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2세 (문단 편집) == 독일 통치 == [[알자스-로렌|로타링기아(로트링겐)]]에서의 봉기를 진압한 다음에, 오토는 남독일에서 곤경에 처했다. [[바이에른]]의 [[공작(작위)|공작]] [[하인리히 2세]]가 [[슈바벤]] 공작령을 소유하는 것을 오토 2세가 거부했기 때문이다. 974년 하인리히의 어머니 유디트가 하인리히와 함께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고 [[보헤미아]]와 [[폴란드]]의 [[공작(작위)|공작]]들, 프라이징 [[주교]] 아브라함과 성직자들, 전 황제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역시 이 음모에 가담했다. 이들의 계획은 발각되어 쉽게 진압되었다. 또 오토 2세의 군대는 제국 황제의 힘을 실추시키려는 [[덴마크]]의 왕 [[하랄 1세 블로탄]]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, 그의 확장은 보헤미아 인들의 저항을 불러와 975년 [[바이에른]]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실패했다. 다음 해 오토 2세는 2번째로 로타링기아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[[하인리히 2세]]에게 레겐스부르크에서 보헤미아로 도망가라고 압박했다. [[바이에른]]은 결국 [[슈바벤]]의 [[공작(작위)|공작]] 오토 1세에게 할당된다. 977년에 그는 보헤미아로 다시 원정을 떠났다. 보헤미아의 볼레슬라우스 2세가 초기의 충성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. [[폴란드]] [[대공(작위)|대공]] [[미에슈코 1세]] 역시 항복했다. 그 동안 제국 서부에서 오토는 영지와 특권을 회복하려는 대영주들의 야심을 꺾으려고 시도했다. 973년에는 아버지가 몰수했던 몽스와 루벤의 땅을 되찾았다. 그리고 977년 [[로타리우스]]의 동생 샤를을 하 로트링기아의 공작으로 임명했다. 이것은 자신의 공작령을 요구했던 [[프랑스]] 왕을 매우 화나게 했다. 오토가 바이에른을 다시 되찾으려는 하인리히 2세의 시도를 저지한 다음에, 로타리우스가 2만 군사를 통솔하여 로트링기아를 침공하고 5일 동안 아헨을 점령했다. 오토 2세는 우선 쾰른과 작센을 포기했다. [[프랑스]] 출신인 오토의 어머니는 로타리우스의 편을 들고 부르고뉴에 있는 콘라트의 궁정으로 옮겼다. 978년 9월 오토 2세는 3만 군대로 [[프랑스]]를 침공하여 보복하려고 했다. 그는 별로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군대에서 전염병이 돌아 파리 공격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. 돌아오는 중에 오토 군의 후방 부대가 [[프랑스군]]의 공격에 무너졌다. 후에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어 로타리우스는 로트링기아의 요구를 포기했고, 오토는 로타리우스의 아들 루이의 권리를 인정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